뉴욕 제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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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뉴욕 제츠는 1959년 창단된 미국의 프로 미식축구팀으로, 현재 뉴저지주 이스트 러더퍼드의 메트라이프 스타디움을 홈구장으로 사용한다. 원래 뉴욕 타이탄스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여, 1963년 뉴욕 제츠로 변경되었으며, 1968년 AFL 챔피언십에서 우승하고, 이듬해 슈퍼볼 III에서 볼티모어 콜츠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팀은 조 네이머스, 돈 메이너드 등 여러 명의 명예의 전당 헌액 선수를 배출했으며,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 버펄로 빌스, 마이애미 돌핀스, 뉴욕 자이언츠와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뉴욕 제츠는 여러 차례 헤드 코치와 구단주 교체를 겪었으며, 현재 우디 존슨이 구단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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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제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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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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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단일 | 1959년 8월 14일 |
첫 시즌 | 1960년 |
연고지 | 메트라이프 스타디움 이스트러더퍼드, 뉴저지 주 |
소재지 | 애틀랜틱 헬스 시스템 제츠 훈련 센터 플로럼 파크, 뉴저지 주 |
유니폼 | New York Jets Uniforms 2024-Present.png |
팀 색상 | 레거시 그린, 레거시 화이트, 레거시 블랙 |
별칭 | 갱 그린 뉴욕 색 익스체인지 (1980년대 초 수비 라인) |
웹사이트 | newyorkjets.com |
역사 | |
이전 명칭 | 뉴욕 타이탄스 (1960–1962) |
리그 제휴 | 아메리칸 풋볼 리그 (1960–1969) |
디비전 | 동부 디비전 (1960–1969) |
NFL 참가 연도 | 1970년 |
현재 소속 리그 | 아메리칸 풋볼 콘퍼런스 (1970–현재) AFC 동부 (1970–현재) |
경기장 | |
홈 경기장 | 폴로 그라운즈 (1960년–1963년) 셰이 스타디움 (1964년–1983년) 자이언츠 스타디움 (1984년–2009년) 메트라이프 스타디움 (2010년–현재) |
우승 기록 | |
리그 챔피언십 | AFL 챔피언십 (1회) 1968년 † – 슈퍼볼이 개최된 같은 시즌에 획득한 1968년 AFL 챔피언십은 포함되지 않음 |
슈퍼볼 챔피언십 | 1968년 (III) |
디비전 챔피언십 | 4회 |
디비전 챔피언십 상세 기록 | |
AFL 동부 | 1968년, 1969년 |
AFC 동부 | 1998년, 2002년 |
플레이오프 | |
플레이오프 진출 횟수 | 14회 |
플레이오프 상세 기록 | AFL: 1968년, 1969년 NFL: 1981년, 1982년, 1985년, 1986년, 1991년, 1998년, 2001년, 2002년, 2004년, 2006년, 2009년, 2010년 |
구단 정보 | |
구단주 | 우디 존슨과 크리스토퍼 존슨 |
회장 | 우디 존슨 |
CEO | 우디 존슨 |
사장 | 하이미 엘하이 |
단장 | 필 새비지 (임시) |
감독 | 제프 얼브리치 (임시) |
영구 결번 | 12 13 28 73 90 |
2. 역사
1959년 8월 14일, 아메리칸 풋볼 리그(AFL)의 첫 번째 조직 회의가 열렸다.[12] 해리 와이즈머는 뉴욕을 대표하여 뉴욕주가 또 다른 프로 미식축구 팀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으며 자신이 팀 운영을 맡을 수 있다고 선언했다.[12] 와이즈머는 뉴욕 타이탄스(Titans of New York)라는 팀을 창단했고, "타이탄스는 자이언츠보다 크고 강하다"라고 말했다.[13]
1963년, 소니 워블린을 중심으로 한 5명의 신디케이트는 파산 위기에 놓인 타이탄스를 100만달러에 인수했다.[19] 워블린은 팀이 라과디아 공항 근처 셰이 스타디움에서 뉴욕 메츠와 함께 경기를 할 예정이었기에 팀 이름을 뉴욕 제츠(New York Jets)로 변경했다.[20][21] 제츠의 구단주들은 위브 이뱅크를 단장 겸 헤드 코치로 고용했다.[19] 이뱅크와 쿼터백 조 네이머스는 1969년슈퍼볼 III에서 압도적인 우승 후보였던 볼티모어 콜츠를 꺾고 프로 미식축구계에서 AFL의 입지를 굳히며 제츠를 명문팀으로 이끌었다.[9][22]
AFL과 NFL 통합 이후, 제츠는 스타 쿼터백 조 네이머스의 부상으로 인해 평범한 시기를 보냈다.[23] 1982년 뉴욕 색 익스체인지의 활약으로 AFC 챔피언십 게임에 진출했다.[24] 1990년대 초반, 팀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27] 브루스 코슬렛,[28] 피트 캐롤[29][30], 리치 코타이트[31]등 여러 감독들이 팀을 이끌었지만,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1997년, 빌 파셀스가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에서 제츠로 옮겨와 팀을 이끌었다.[32] 그는 팀을 재건하여 1998년에 AFC 챔피언십 게임까지 진출시켰다.[33][34] 1999년 팀의 구단주였던 레온 헤스가 사망했다.[34] 시즌이 끝날 무렵, 파셀스는 헤드 코치 자리에서 물러났고, 그의 후임으로 빌 벨리칙이 임명되었으나,[35] 벨리칙은 다음 날 바로 사임하고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의 헤드 코치 자리를 수락했다.[36]
2000년, 제츠는 존슨 앤 존슨의 우디 존슨을 새로운 구단주로 맞이했다.[37] 2000년대에 제츠는 허먼 에드워즈, 에릭 매니지니, 렉스 라이언 감독의 지휘 아래 프랜차이즈 역사상 가장 많은 5번의 플레이오프 진출을 기록했다.[38][39][40] 특히 렉스 라이언 감독과 마크 산체스 쿼터백 콤비는 2009년과 2010년, 두 시즌 연속으로 AFC 챔피언십 게임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었다.[43]
2014년, 4승 12패의 부진한 성적을 거둔 후 마크 산체스가 방출되고, 렉스 라이언 감독과 존 이지크 단장이 해고되었다.[46][47] 2015년, 토드 보울스 감독 부임 첫 해에 제츠는 10승 6패를 기록하며 AFC 동부 지구 2위를 차지했지만,[49][50] 포스트 시즌 진출에는 실패했다. 2016년부터 2018년까지 제츠는 3년 연속 AFC 동부 지구 최하위에 머물렀고,[51][52][53] 2018년 시즌 후 토드 보울스 감독이 해고되었다.[54] 2019년, 애덤 게이즈 감독이 부임했으나, 2019년 7승 9패, 2020년 2승 14패로 부진한 성적을 거듭하며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했고,[57][58] 2020년 시즌 후 해고되었다.[59]
2021년, 로버트 살레 감독이 부임하고,[60] 드래프트 전체 2순위로 쿼터백 자크 윌슨을 지명했으나,[61] 2021년 4승 13패,[62] 2022년 7승 10패로[63] 2년 연속 AFC 동부 지구 최하위에 머물렀다. 2023년, 애런 로저스를 영입하며 기대를 모았으나,[64] 로저스가 시즌 초반 아킬레스건 부상을 당하면서[65] 7승 10패로 시즌을 마감했다.[66][67]
2. 1. 창단과 초기 (1960-1969)
1959년 8월 14일, 아메리칸 풋볼 리그(AFL)의 첫 번째 조직 회의가 열렸다.[12] 이 회의에서 해리 와이즈머는 뉴욕주가 또 다른 프로 미식축구 팀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으며 자신이 운영을 맡을 수 있다고 선언했다.[12]와이즈머는 뉴욕 타이탄스(Titans of New York)라는 프랜차이즈를 승인받았다. 그는 "타이탄스는 자이언츠보다 크고 강하다"라고 설명했다.[13] 와이즈머는 낡은 폴로 그라운드를 홈 구장으로 정했고, 타이탄스는 처음 3년 동안 재정과 경기력 양면에서 어려움을 겪었다.[14] 새미 보 초대 감독 아래, 타이탄스는 1960년과 1961년 모두 7승 7패를 기록했다.[15][16][17] 1962년이 되자 와이즈머의 부채는 계속 쌓였고, 결국 AFL이 시즌 말까지 팀 운영비를 부담했다.[18]
1963년, 소니 워블린을 중심으로 한 5명의 신디케이트가 파산 위기에 놓인 타이탄스를 100만달러에 인수했다.[19] 워블린은 팀이 라과디아 공항 근처 셰이 스타디움에서 뉴욕 메츠와 함께 경기를 할 예정이었기에 팀 이름을 뉴욕 제츠(New York Jets)로 변경했다.[20][21] 제츠의 구단주들은 위브 이뱅크를 단장 겸 헤드 코치로 고용했다.[19] 이뱅크와 쿼터백 조 네이머스는 1969년슈퍼볼 III에서 압도적인 우승 후보였던 볼티모어 콜츠를 꺾고 프로 미식축구계에서 AFL의 입지를 굳히며 제츠를 명문팀으로 이끌었다.[9][22]
다음은 제츠가 AFL 동부 지구에서 활동한 1960년대의 기록이다.
년도 | 지구 우승 | 2위 | 3위 | 4위 | 5위 | |||||||||||||||
---|---|---|---|---|---|---|---|---|---|---|---|---|---|---|---|---|---|---|---|---|
팀 | 승 | 패 | 무 | 팀 | 승 | 패 | 무 | 팀 | 승 | 패 | 무 | 팀 | 승 | 패 | 무 | 팀 | 승 | 패 | 무 | |
1969 | NY(d) | 10 | 4 | 0 | HOU(d) | 6 | 6 | 2 | BOS | 4 | 10 | 0 | BUF | 4 | 10 | 0 | MIA | 3 | 10 | 1 |
1968 | NY(V) | 11 | 3 | 0 | HOU | 7 | 7 | 0 | MIA | 5 | 8 | 1 | BOS | 4 | 10 | 0 | BUF | 1 | 12 | 1 |
1967 | HOU(a) | 9 | 4 | 1 | NY | 8 | 5 | 1 | BUF | 4 | 10 | 0 | MIA | 4 | 10 | 0 | BOS | 3 | 10 | 1 |
1966 | BUF(a) | 9 | 4 | 1 | BOS | 8 | 4 | 2 | NY | 6 | 6 | 2 | HOU | 3 | 11 | 0 | MIA | 3 | 11 | 0 |
슈퍼볼 시작 | ||||||||||||||||||||
1965 | BUF(a) | 10 | 3 | 1 | NY | 5 | 8 | 1 | BOS | 4 | 8 | 2 | HOU | 4 | 10 | 0 | ||||
1964 | BUF(v) | 12 | 2 | 0 | BOS | 10 | 3 | 1 | NY | 5 | 8 | 1 | HOU | 4 | 10 | 0 | ||||
1963 | BOS(a) | 7 | 6 | 1 | BUF(d) | 7 | 6 | 1 | HOU | 6 | 8 | 0 | NY | 5 | 8 | 1 | ||||
1962 | HOU(a) | 11 | 3 | 0 | BOS | 9 | 4 | 1 | BUF | 7 | 6 | 1 | NY | 5 | 9 | 0 | ||||
1961 | HOU(v) | 10 | 3 | 1 | BOS | 9 | 4 | 1 | NY | 7 | 7 | 0 | BUF | 6 | 8 | 0 | ||||
1960 | HOU(v) | 10 | 4 | 0 | NY | 7 | 7 | 0 | BUF | 5 | 8 | 1 | BOS | 5 | 9 | 0 |
- BUF:버펄로 빌스, HOU:휴스턴 오일러스, BOS:보스턴 패트리어츠, NY:'''뉴욕 타이탄스→뉴욕 제츠''', MIA:마이애미 돌핀스
- 괄호 안의 문자: V: 슈퍼볼(AFL-NFL 월드 챔피언십 게임) 우승, s: 슈퍼볼 패배・AFL 우승, a: AFL 결승 패배, d: 디비전 플레이오프 패배, v: AFL 우승 (AFL-NFL 월드 챔피언십 게임 설립 전)
제츠는 1968년 AFL 챔피언십에서 오클랜드 레이더스를 27-23으로 꺾고 AFL 챔피언에 등극했다.
시즌 | 감독 | 경기장 | 상대팀 | 점수 | 기록 | |
---|---|---|---|---|---|---|
1968 | 위브 이뱅크 | 셰이 스타디움(뉴욕) | 오클랜드 레이더스 | 27–23 | 11–3 | |
총 AFL 챔피언십 우승: | 1 |
이후 1968년 슈퍼볼 III에서 볼티모어 콜츠를 16-7로 꺾고 슈퍼볼 우승을 차지했다.
시즌 | 감독 | 슈퍼볼 | 개최 장소 | 상대팀 | 점수 | 기록 |
---|---|---|---|---|---|---|
1968 | 위브 이뱅크 | III | 오렌지 볼 (마이애미) | 볼티모어 콜츠 | 16–7 | 11–3 |
총 슈퍼볼 우승: | 1 |
2. 2. 네이머스 이후의 시대 (1970-1996)
AFL과 NFL 통합 이후, 뉴욕 제츠는 스타 쿼터백 조 네이머스가 부상으로 선수 경력의 많은 부분을 망치면서 평범한 시기를 보냈다.[23] 1970년대 제츠는 1972년, 1974년 7승 7패의 성적을 기록했지만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했고, 1976년에는 네이머스가 11경기에서 단 4개의 터치다운(TD)밖에 던지지 못했고 반대로 16개의 인터셉트(INT)를 기록했다. 결국 네이머스는 1977년 웨이버 공시되어 로스앤젤레스 램스로 이적한 후 은퇴하였다.1980년대에 들어서 제츠는 뉴욕 색 익스체인지의 활약으로 1982년 AFC 챔피언십 게임에 진출하는 등 성공을 거두었다.[24] 1981년에는 1970년 AFL이 NFL에 흡수 합병된 이후 처음으로 10승 5패 1무의 성적을 거두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마크 가스티노, 조 클레코는 상대 QB에게 총 40번의 색을 기록했고, 마티 라이언스, 압둘 살람과 함께 뉴욕 증권 거래소를 본떠 '뉴욕 색 익스체인지'(New York Sack Exchange)라고 불렸다.[178] 1982년에는 색 익스체인지를 대표하는 수비와 프리먼 맥닐의 활약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 원정에서 신시내티 벵갈스, 오클랜드 레이더스를 꺾고 AFC 챔피언십 게임에서 마이애미 돌핀스와 대결했지만 0-14로 패했다.[184] 월트 미카엘스와 조 월튼이 10년 동안 팀을 코치했다.[25][26]
1990년대 초반, 팀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27] 1990년 신시내티 벵갈스의 오펜스 코디네이터였던 브루스 코슬렛이 헤드 코치가 되었다. 1991년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1992년 4승 12패로 부진했다. 결국 구단주 레온 헤스는 브루스 코슬렛 코치를 해고하고,[28] 피트 캐롤을 고용했지만, 6승 10패의 성적을 거두고 시즌 말에 즉시 해고되었다.[29][30] 이후 리치 코타이트가 팀을 이끌었지만, 다음 2년 동안 4승 28패를 기록하였고,[31] 코타이트는 두 번째 시즌 말에 물러났다.[27]
2. 3. 파셀스와 벨리칙 시대 (1997-2000)
빌 파셀스는 1997년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에서 뉴욕 제츠로 옮겨와 팀을 이끌었다.[32] 그는 팀을 재건하여 1998년에 AFC 챔피언십 게임까지 진출시켰다.[33][34]1999년, 팀의 구단주였던 레온 헤스가 사망했다.[34] 시즌이 끝날 무렵, 파셀스는 헤드 코치 자리에서 물러났고, 그의 후임으로 빌 벨리칙이 임명되었다.[35] 그러나 벨리칙은 다음 날 바로 사임하고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의 헤드 코치 자리를 수락했다.[36] 이는 NFL 역사에서 매우 이례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2. 4. 2000년대 이후
2000년대에 뉴욕 제츠는 허먼 에드워즈, 에릭 매니지니, 렉스 라이언 감독의 지휘 아래 프랜차이즈 역사상 가장 많은 5번의 플레이오프 진출을 기록했다.[38][39][40] 특히 렉스 라이언 감독과 마크 산체스 쿼터백 콤비는 2009년과 2010년, 두 시즌 연속으로 AFC 챔피언십 게임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었다.[43]2000년, 제츠는 존슨 앤 존슨의 우디 존슨을 새로운 구단주로 맞이했다.[37] 같은 해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지명권 4개를 활용하여 디펜시브 엔드 숀 엘리스, 존 에이브러햄, 타이트 엔드 앤서니 베크트, 쿼터백 채드 페닝턴을 영입하며 전력을 보강했다.
알 그로 감독이 이끌던 2000년 시즌, 제츠는 마이애미 돌핀스와의 먼데이 나이트 풋볼 경기에서 3쿼터 종료 시점에 7-30으로 뒤지고 있었으나, 연장전 끝에 40-37로 대역전승을 거두었다.[189] 이 경기는 먼데이 나이트 미라클로 불리며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190]
2001년, 탬파베이 버커니어스에서 토니 던지 감독의 어시스턴트 코치를 맡았던 허먼 에드워즈가 새로운 헤드 코치로 부임했다.[193] 에드워즈 감독은 부임 첫 해부터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는 지도력을 발휘했다.[194]
2002년, 제츠는 AFC 동부 지구 우승을 차지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195] 페이튼 매닝이 이끄는 인디애나폴리스 콜츠와의 와일드카드 경기에서 41-0으로 대승을 거두었으나,[184] 디비전 플레이오프에서 오클랜드 레이더스에게 패하며 시즌을 마감했다.
2004년, 제츠는 10승 6패의 성적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여 샌디에이고 차저스와 와일드카드 경기를 치렀다. 연장전 끝에 더그 브라이언의 28야드 필드 골로 승리했으나,[184] 디비전 플레이오프에서 피츠버그 스틸러스에게 연장전 끝에 패배했다.
2006년, 에릭 맨지니 감독 체제에서 제츠는 10승 6패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나,[198]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와의 와일드카드 경기에서 패배했다.
2009년, 렉스 라이언 감독과 신인 쿼터백 마크 산체스의 활약으로 제츠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여 AFC 챔피언십 게임까지 진출했지만, 인디애나폴리스 콜츠에게 패하며 슈퍼볼 진출에는 실패했다.[184]
2010년에도 제츠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여 AFC 챔피언십 게임까지 진출했으나, 피츠버그 스틸러스에게 패하며 2년 연속 슈퍼볼 문턱에서 좌절했다.[184]
2014년, 4승 12패의 부진한 성적을 거둔 후 마크 산체스가 방출되고, 렉스 라이언 감독과 존 이지크 단장이 해고되었다.[46][47]
2015년, 토드 보울스 감독 부임 첫 해에 제츠는 10승 6패를 기록하며 AFC 동부 지구 2위를 차지했지만,[49][50] 포스트 시즌 진출에는 실패했다.
2016년부터 2018년까지 제츠는 3년 연속 AFC 동부 지구 최하위에 머물렀고,[51][52][53] 2018년 시즌 후 토드 보울스 감독이 해고되었다.[54]
2019년, 애덤 게이즈 감독이 부임했으나, 2019년 7승 9패, 2020년 2승 14패로 부진한 성적을 거듭하며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했고,[57][58] 2020년 시즌 후 해고되었다.[59]
2021년, 로버트 살레 감독이 부임하고,[60] 드래프트 전체 2순위로 쿼터백 자크 윌슨을 지명했으나,[61] 2021년 4승 13패,[62] 2022년 7승 10패로[63] 2년 연속 AFC 동부 지구 최하위에 머물렀다.
2023년, 애런 로저스를 영입하며 기대를 모았으나,[64] 로저스가 시즌 초반 아킬레스건 부상을 당하면서[65] 7승 10패로 시즌을 마감했다.[66][67]
시즌 | 팀 | 리그 | 컨퍼런스 | 디비전 | 정규 시즌 | 포스트시즌 결과 | 수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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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위 | 승 | 패 | 무 | |||||||
2019 | NFL | AFC | 동부 | 3위 | 7 | 9 | 0 | — | — | |
2020 | NFL | AFC | 동부 | 4위 | 2 | 14 | 0 | — | — | |
2021 | NFL | AFC | 동부 | 4위 | 4 | 13 | 0 | — | — | |
2022 | NFL | AFC | 동부 | 4위 | 7 | 10 | 0 | — | — | |
2023 | NFL | AFC | 동부 | 3위 | 7 | 10 | 0 | — | — |
[138]
소니 워블린은 러트거스 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음악 회사에 고용되어 텔레비전 부문 사장이 되었다.[69] 미디어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팀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기로 결심하고, 팀 이름과 유니폼을 바꾼 후 조 네이머스를 영입했다.[69] 워블린의 도박은 네이머스가 슈퍼볼 III에서 제츠를 승리로 이끌면서 결실을 맺었지만, 그 당시 워블린은 이미 팀 지분을 매각한 상태였다.[69]
3. 구단 소유권
워블린의 파트너들은 팀 운영 방식에 대해 워블린과 갈등을 겪었다. 워블린은 파트너들의 의견을 거의 반영하지 않고 모든 결정을 스스로 내렸고, 이는 파트너들을 매우 실망시켰다.[70] 워블린은 결국 1968년에 팀을 매각했다.[69] 이후 워블린은 뉴저지 스포츠 및 박람회 당국의 초대 회장 겸 CEO가 되어 자이언츠 스타디움을 포함한 메도우랜즈 스포츠 단지 건설을 도왔다.[69]
레온 헤스는 헤스 코퍼레이션 주유소로 잘 알려졌으며, 제츠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헤스는 셰이 스타디움 시절 팀의 개선을 요구했지만, 축구 운영에는 관여하지 않고 코치와 단장에게 결정을 맡겼다.[71] 1973년 팀의 최대 주주가 된 헤스는 1976년 필립 H. 아이슬린의 지분을 매입했고, 1981년과 1984년에 다른 파트너들의 지분을 각각 500만달러에 매입하여 팀에 대한 단독 지배권을 획득했다.[72][73]
헤스는 팀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고 패배를 안타까워했다.[71] 1995년 피트 캐롤 감독 아래 6승 10패의 시즌을 보낸 후, 헤스는 리치 코타이트를 새 코치로 소개하며 "나는 80세이고, 지금 당장 결과를 원한다"라고 말했다.[71] 코타이트와 함께 2년 동안 실패한 후, 헤스는 빌 파셀스를 고용하는 데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그는 1999년 5월 7일에 사망했다.[71]
3. 1. 해리 와이즈머 (1960-1962)
해리 위즈머는 스포츠 사업가로, 아메리칸 풋볼 리그 창립에 기여했으며 뉴욕에서 팀을 운영할 수 있는 프랜차이즈를 받았다.[68] 그는 '누구를 아느냐가 가장 중요하다'는 철학을 가지고 팀과 리그의 성공을 위해 노력했다.[68]
위즈머는 고등학교 시절 3개 종목의 레터맨이었으며, 플로리다 대학교와 미시간 주립 대학교에서 풋볼 선수로 활동했지만 무릎 부상으로 선수 생활을 마쳤다.[68] 이후 방송인으로 경력을 시작하며 업계의 선구자가 되었다. 타이탄스의 구단주로서 방송 권리를 팀 간에 동등하게 분배하는 리그 전체 정책을 수립했다.[68]
타이탄스의 첫 두 시즌 동안 성적이 부진했고, 2년 차에는 관중 수가 감소하면서 그의 노력은 부채로 이어졌다.[68] 1963년 2월, 이 프랜차이즈는 소니 워블린이 이끄는 5인 신디케이트에 100만달러에 매각되었다.[68]
3. 2. 소니 워블린 신디케이트 (1963-1968)
소니 워블린은 미디어 전문가로, 팀을 개혁하고 조 네이머스를 영입하는 등 뉴욕 제츠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파트너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1968년에 팀을 매각하게 되었다.[71][72][73]
3. 3. 레온 헤스 (1968-1999)
헤스 코퍼레이션의 설립자 레온 헤스는 팀 운영에 소극적으로 관여했으며, 축구와 관련된 결정은 코치와 단장에게 위임했다. 1999년에 헤스는 사망했다.[74]
3. 4. 우디 존슨 (2000-현재)
존슨앤존슨의 상속자인 우디 존슨은 2000년에 6.35억달러에 뉴욕 제츠를 인수했다.[74] 존슨은 팀 인수 당시 다른 NFL 구단주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스포츠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자신의 팀을 소유하고 싶어했다.[74] 그는 직원들에게 최고의 것을 바라는 지원자로 여겨져 왔다.[74]
존슨은 헤스 구단주와 마찬가지로, 축구 관련 결정은 경영팀에 맡기고 주목받는 것을 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렉스 라이언 감독을 고용한 후, 팀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높였다.[74][75][76]
2017년, 우디 존슨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의해 주영국 미국 대사로 임명되었다.[77] 그의 대사 임기 동안, 그의 형제인 크리스토퍼 존슨이 공동 소유주로서 팀의 일상적인 운영을 맡았다.[78] 2021년, 우디 존슨의 대사 임기가 종료되자, 그는 크리스토퍼로부터 소유권 관련 업무를 넘겨받았다.[79]
3. 5. 크리스토퍼 존슨 (2017-2021)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크리스토퍼 존슨(2017-2021)에 대한 내용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요약에 제시된 "우디 존슨의 주영국 미국 대사 임명 기간 동안 팀 운영 대행"이라는 정보는 원본 소스에서 찾을 수 없다. 주어진 섹션 제목과 요약에 해당하는 내용을 원본 소스에서 찾을 수 없으므로, 이 섹션에는 내용을 작성할 수 없다.
4. 경기장
뉴욕 제츠는 창단 이후 여러 경기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해왔다. 1983년까지는 뉴욕 시내의 경기장을 사용했지만, 이후 뉴저지주로 연고지를 이전하면서 뉴욕 자이언츠와 경기장을 공유하게 되었다.
제츠는 웨스트 사이드 스타디움 건설을 추진하기도 했다. 맨해튼 서쪽에 새 경기장을 건설하기 위해 메트로폴리탄 교통국(MTA)과 협상했고, 웨스트 사이드 야드 부지 소유권을 두고 케이블비전 등과 경쟁했다.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 시장은 2008년 자이언츠 스타디움 임대 계약이 만료되면 제츠를 웨스트 사이드로 이전하는 방안을 제안하기도 했다.[86][87] 그러나 케이블비전은 매디슨 스퀘어 가든과의 경쟁을 우려해 제츠의 부지 소유에 반대했다.[86] 2010년 슈퍼볼 뉴욕 유치 투표에서 31대 1로 가결되었지만, 이는 제츠가 입찰에서 승리하고 2010년까지 경기장 건설을 완료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86]
MTA는 위원회 동의를 얻어 약 2.1억달러에 제츠에 부지를 판매하기로 했다.[88] 그러나 케이블비전, 지역 사회 단체, 교통 옹호자들의 반발로 환경 문제 관련 소송이 제기되었다.[89] 셸던 실버와 조셉 L. 브루노 등 정치권 인사들도 웨스트 사이드 개발에 부정적 입장을 밝히면서 제츠의 경기장 건설 계획은 무산되었다.[89][90]
결국 제츠는 뉴저지에 남기로 하고, 라이벌인 자이언츠와 공동으로 메트라이프 스타디움을 건설하기로 합의했다.[91] 이는 NFL 역사상 최초로 두 팀이 공동 건설한 경기장이었다.[92] 2010년 4월 개장한 이 경기장은 경기를 주최하는 팀에 따라 조명 색상이 바뀐다.[93][94]
4. 1. 폴로 그라운드 (1960-1963)
구단주 해리 와이스머는 팀의 홈 경기를 치를 장소를 찾았지만, 1957년 야구 뉴욕 자이언츠가 스타디움을 떠난 이후 주요 입주자가 없었던 낡은 폴로 그라운즈를 확보하는 데 그쳤다. 타이탄스는 이 스타디움에서 첫 4시즌을 보냈고, 마지막 시즌에는 제츠로 이름을 변경했다. 타이탄스는 1964년 퀸스에 있는 셰이 스타디움으로 두 팀이 모두 옮기기 전까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새로운 확장 팀인 뉴욕 메츠와 함께 스타디움을 공유했다. 제츠는 1963년 12월 14일 버펄로 빌스에게 19-10으로 패한 경기로 폴로 그라운즈에서 마지막 경기를 치른 팀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80]4. 2. 셰이 스타디움 (1964-1983)

구단주 해리 와이스머는 팀의 홈 경기장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1957년 야구 뉴욕 자이언츠가 떠난 이후 주요 입주자가 없었던 낡은 폴로 그라운즈를 확보하는 데 그쳤다. 타이탄스는 이 경기장에서 첫 4시즌을 보냈고, 마지막 시즌에는 제츠로 이름을 바꿨다. 1964년, 제츠는 퀸스에 있는 셰이 스타디움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새로운 확장 팀인 뉴욕 메츠와 경기장을 공유했다. 제츠는 1963년 12월 14일 버펄로 빌스에게 19-10으로 패한 경기를 끝으로 폴로 그라운즈에서 마지막 경기를 치른 팀이 되었다.[80]
와이스머는 1961년부터 타이탄스가 셰이 스타디움에서 경기하기를 원했다.[81] 그러나 자금난과 법적 문제로 경기장 건설이 지연되었다.[81] 와이스머는 1961년 말에 타이탄스의 새로운 홈을 확보하기 위해 양해 각서에 서명했다.[81] 이 양해 각서에는 메츠가 시즌을 마칠 때까지 경기장을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팀이 새로운 소유주 아래 셰이로 이동하면서, 대부분 시즌을 여러 원정 경기로 시작해야 했는데, 이는 1969년과 1973년에 메츠가 장기간 플레이오프를 치르면서 더욱 악화되었다.[81][82]
이러한 상황이 제츠에게 불리하다고 판단한 팀은 1977년에 9월 한 달 동안 연간 두 번의 홈 경기를 뉴저지에 있는 자이언츠의 새로운 홈인 자이언츠 스타디움에서 치르겠다고 발표했다. 뉴욕시와 제츠 사이에 소송이 시작되었고, 소송 합의에서 시는 제츠가 남은 6년 동안 1978년부터 셰이에서 시즌당 두 번의 9월 홈 경기를 치르도록 허용하기로 합의했다. 1977년, 제츠는 자이언츠 스타디움에서 9월 경기를 한 번, 10월 2일 셰이에서 경기를 치를 예정이었다.[83]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대주주 레온 헤스는 1983년에 만료될 예정인 셰이에서의 팀 임대 계약을 갱신하는 데 관심을 보였다. 헤스는 뉴욕 시장 에드 코치와 협상했다.[84] 헤스는 시가 경기장을 재개발하여 수용 인원을 늘리기를 원했다. 그는 또한 임대 계약의 다른 측면, 즉 제츠가 셰이에서 주차하는 티켓 소지자로부터 돈을 받지 못하는 것을 재협상하기를 희망했다. 헤스의 제안은 코치의 반대에 부딪혔다.[84] 협상이 교착 상태에 이르자 제츠는 뉴저지로 떠날 의사를 발표했다.[84] 1983년 12월 10일, 제츠는 셰이에서 마지막 경기를 치렀고 스틸러스에게 34-7로 패했다.[82] 팬들이 기념품을 위해 경기장을 약탈하자 전광판에는 제츠가 메도우랜즈로 떠나는 것을 언급하며 "N.J. 제츠"라는 문구가 표시되었다.[82]
4. 3. 자이언츠 스타디움 (1984-2009)
제츠가 뉴욕 자이언츠와 함께 자이언츠 스타디움에 합류했을 때, 많은 제츠 팬들은 경기장 이름이 바뀌기를 원했다. 그러나 경기장 명칭 변경 권한을 가진 자이언츠는 이를 거부했다.[85] 다른 팀을 위해 건설되고 장식된 경기장에서 경기한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경기장 직원들은 제츠 경기 동안 녹색 배너를 걸고 자이언츠 로고 위에 제츠 로고를 배치하여 경기장을 좀 더 제츠 친화적으로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다. 파란색과 빨간색 좌석은 변경할 수 없었다.[85] 제츠는 1985년 12월 28일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에게 패하며 스타디움 역사상 첫 NFL 플레이오프 경기를 치렀다.[85]4. 4. 메트라이프 스타디움 (2010-현재)
MetLife Stadium영어은 뉴저지주 이스트 러더퍼드에 있는 경기장으로, 뉴욕 자이언츠와 공동으로 건설되었다. NFL 역사상 최초로 두 팀이 공동으로 건설한 경기장이다.[92] 2010년 4월에 개장했으며, 제츠와 자이언츠는 프리시즌 시범 경기를 통해 함께 개장했다.[93][94] 경기를 주최하는 팀에 따라 다른 색상으로 조명이 켜진다.[93]새로운 스타디움에서 제츠의 첫 정규 시즌 홈 경기는 2010년 9월 13일에 열렸으며, 먼데이 나이트 풋볼에서 전국적으로 방송되었다. 뉴욕은 볼티모어 레이븐스에 10-9로 패했다.[95] 2014년에는 슈퍼볼 XLVIII이 이 경기장에서 개최되었다.[93]
1984년부터 내셔널 풋볼 컨퍼런스(NFC)의 뉴욕 자이언츠가 1976년 개장부터 사용해온 자이언츠 스타디움을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임대"가 아닌 "공용"이지만, 해당 스타디움은 자이언츠의 색채가 강하며, 두 팀 모두 뉴욕 시내에서 이전한 상태가 되었다. 뉴욕시의 2012년 올림픽 유치에서 메인 스타디움으로 맨해튼 지구에 새 스타디움을 건설하는 계획이 제기되었고[211], 실현되었다면 제츠의 새로운 홈구장이 될 예정이었지만 결국 개최지 선정에서 런던에 패했다. 또한 시에서도 MLB의 양키스, 메츠도 각각 새로운 구장 건설 예정이었기 때문에 예산이 승인되지 않아, 이 계획은 백지화되었다. 그 때문에 현재는 뉴저지 메도우랜즈에 두 팀의 새 홈구장 (메도우랜즈 스타디움)이 건설되었다. 2010년 시즌부터 사용되는 해당 스타디움에서의 시즌 개막전은 동전 던지기에서 자이언츠에게 양보했지만 먼데이 나이트 풋볼에서 제츠도 이용하기로 결정되었다.[212]
(1981년부터 1996년까지의 내용은 해당 섹션과 관련이 없으므로 삭제)
5. 라이벌 관계
뉴욕 제츠는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 버펄로 빌스, 마이애미 돌핀스 등 여러 팀들과 라이벌 관계를 맺고 있다.
패트리어츠와의 라이벌 관계는 1997년 빌 파셀스 감독이 뉴잉글랜드에서 제츠로 옮기면서 시작되었다.[96] 이후 커티스 마틴 선수 영입,[96] 빌 벨리칙 감독의 제츠 코치직 사임 및 패트리어츠 부임,[98][99] 스파이게이트 사건[102] 등으로 관계가 악화되었다.
빌스는 같은 뉴욕주를 연고로 하는 팀으로서(제츠는 뉴저지에서 경기) 지역 감정을 반영하는 라이벌 관계이다.[105] O. J. 심슨의 NFL 러싱 기록 갱신,[105] 1981년 와일드 카드 경기[106], 렉스 라이언 감독의 빌스 코칭[107] 등이 주요 사건이다.
돌핀스와는 1966년부터 라이벌 관계가 이어져 오고 있다.[112] 1983년 AFC 챔피언십 경기,[114] 1994년 페이크 스파이크 플레이,[115] 2000년 먼데이 나잇 미라클[116] 등이 대표적인 사건이다.
뉴욕 자이언츠와는 과거 치열한 경쟁 관계였으나, 정규 시즌 경기 빈도가 줄면서 관계가 완화되었다.[120] 1969년 첫 프리시즌 경기,[120] 자이언츠 스타디움 및 메트라이프 스타디움 공동 사용,[91][120][124] 2011년 NFL 시즌 경기[125] 등이 주요 사건이다.
5. 1.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
빌 파셀스가 뉴잉글랜드의 헤드 코치직을 사임하고 뉴욕 제츠의 같은 직책을 수락하면서 1997년에 이 라이벌 관계는 심화되어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96] 이듬해 제츠는 프로볼 러닝 백 커티스 마틴을 패트리어츠에서 영입했다.[96] 파셀스의 세 번째 해에 제츠가 부진하자, 파셀스는 헤드 코치직에서 사임하기로 결정했다. 그의 조수 빌 벨리칙이 새로운 헤드 코치로 임명되었지만, 직책을 수락한 지 불과 하루 만에 기자 회견에서 갑자기 사임하고 대신 패트리어츠의 새로운 헤드 코치가 되었다.[98][99] 그의 결정은 1999년 시즌 전에 팀 소유주 레온 헤스가 사망하면서 영향을 받았는데, 그는 한때 벨리칙에게 100만달러의 보너스를 제안하며 잔류를 요청했었다. 그러나 벨리칙은 두 명의 잠재적인 새 소유주인 우디 존슨과 찰스 돌란과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헤스와의 원래 합의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와 문제가 있었다. "그 시점의 전체 소유권 구성은 개인적인 관계보다 제 결정에 훨씬 더 큰 요인이었습니다."[100]2006년, 벨리칙 아래에서 조수를 맡았던 에릭 망기니는 제츠의 헤드 코치가 되기 위해 뉴잉글랜드를 떠났다. 망기니 아래에서 악명 높은 스파이게이트 사건이 발생하여 두 클럽 간의 긴장이 더욱 고조되었다.[102]
5. 2. 버펄로 빌스
뉴욕 제츠와 빌스는 같은 주(제츠는 뉴저지에서 경기를 치르지만)를 대표하며, 이 라이벌 관계는 뉴욕 시와 뉴욕 북부의 차이점을 보여준다. 두 팀 모두 아메리칸 풋볼 리그의 창립 멤버이며, NFL과 AFL이 합병된 이후에도 일반적으로 같은 디비전에 속해 있다. 두 팀의 첫 번째 경기에서 뉴욕 타이탄스(이후 제츠)는 빌스를 27-3으로 꺾었다.[105] O. J. 심슨이 제츠를 상대로 NFL 러싱 기록을 갱신한 사건, 1981년 와일드 카드 라운드에서 두 팀 간의 유일한 플레이오프 경기, 그리고 전 제츠 코치 렉스 라이언이 빌스를 2년 동안 코칭한 것[106][107]과 같은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순간 외에는, 이 라이벌 관계는 마크 산체스(제츠)와 J. P. 로스만(빌스)의 주목할 만한 실수 등, 전반적으로 비슷한 수준의 경기력과 경쟁력 없는 경기로 특징지어졌다.[108][109]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2018년 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선발된 쿼터백 샘 다놀드와 조시 앨런 간의 우호적인 경쟁으로 인해 이 시리즈는 다시 뜨거워졌다.[110] 2023 시즌 현재, 빌스가 통산 69-58로 앞서고 있다.[111]5. 3. 마이애미 돌핀스
마이애미 돌핀스는 1966년에 창단되었고, 이후 뉴욕 제츠와 라이벌 관계를 유지해 왔다.[112] 1983년 AFC 챔피언십 경기에서 A.J. Duhe가 인터셉션 후 터치다운을 기록하며 돌핀스가 승리했고,[114] 이는 양 팀 간의 유일한 포스트시즌 맞대결로 남아 있다.[119] 1994년에는 돌핀스가 페이크 스파이크 플레이로 승리하며 제츠의 시즌을 망치기도 했다.[115] 2000년 10월 23일, 월요일 밤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기에서 제츠는 4쿼터에 23점을 득점하며 돌핀스를 상대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었다.[116]렉스 라이언 감독 시절, 두 팀 간의 신경전이 격화되었고, 2010년에는 라이언 감독이 돌핀스 팬들에게 외설적인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다.[117] 당시 제츠의 체력 코치였던 샐 알로시가 돌핀스 선수 놀란 캐롤에게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 사건도 있었다.[118] 2023년 시즌까지, 마이애미 돌핀스가 통산 전적에서 60–56–1로 앞서고 있다.[119]
5. 4. 뉴욕 자이언츠
뉴욕 제츠는 지역 라이벌인 뉴욕 자이언츠와 한때 긴장감 높은 라이벌 관계를 유지했지만, 정규 시즌 경기 빈도가 줄면서 긴장감이 완화되었다.[120] 1969년 8월 17일, 양 팀의 첫 프리시즌 경기는 "영토 전쟁"으로 여겨졌다.[120] 당시 약체로 평가받던 자이언츠는 팬과 언론의 비판을 받았고,[120] 제츠가 37-14로 승리하며 자이언츠 코치 앨리 셔먼은 해고되었다.[120]두 팀은 선수 간 설전에도 불구하고, 26년간 자이언츠 스타디움을 함께 사용했고, 현재는 메트라이프 스타디움을 공유하며 강력한 파트너십을 형성했다.[91][120][124]
2011년 NFL 시즌, 두 팀은 16주차에 만나 플레이오프 진출을 다투며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경기 전 렉스 라이언 감독과 선수들, 자이언츠 선수들 사이에 설전이 오갔고, 경기 후 라이언과 자이언츠 러닝백 브랜든 제이콥스는 싸움 직전까지 갔다.[125] 자이언츠가 29-14로 승리했다.[125]
2015년 12월 6일, 제츠는 연장전 끝에 23-20으로 승리했고, 2019년에는 34-27, 2023년 10월 29일에는 연장전 끝에 13-10으로 승리했다. 2023 시즌 현재, 자이언츠가 역대 전적 8-7로 앞서고 있다.[126]
6. 선수
뉴욕 제츠는 1965년 조 네이머스(Joe Namath)를 1라운드에 지명하여 팀을 전국적인 주목을 받게 했다.[154] 네이머스는 슈퍼볼 III에서 볼티모어 콜츠(Baltimore Colts)를 상대로 승리했으며, 1985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154]
하지만 제츠는 드래프트 실패(draft bust) 선수들을 지명한 역사도 있다.[155] 1990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2순위로 지명된 블레어 토마스(Blair Thomas)는 높은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했고,[156] 2008년 1라운드 지명 선수 버논 골스턴(Vernon Gholston)은 팀에서 3년간 단 한 번의 삭도 기록하지 못했다.[157]
1995년 카일 브래디(Kyle Brady)는 워렌 sapp(Warren Sapp)보다 먼저 지명되었지만, 리치 코타이트(Rich Kotite) 감독 재임 기간 동안 실망스러운 선수 중 하나였다.[158] 반면, 같은 드래프트에서 제츠는 휴 더글러스(Hugh Douglas)를 지명하여 더 나은 성과를 거두었다. 2003년 드웨인 로버트슨(Dewayne Robertson)은 전체 4순위로 지명되었으나, 5시즌 동안 14.5개의 삭을 기록하며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159]
쿼터백 포지션에서는 1976년 리처드 토드(Richard Todd)가 터치다운보다 인터셉션을 더 많이 던졌고,[160] 2013년 디 밀리너(Dee Milliner)는 부상과 일관성 부족으로 3개의 인터셉션만을 기록했다.[161]
2013년과 2014년 시즌에는 1라운드 지명 선수 무하마드 윌커슨(Muhammad Wilkerson)과 셸던 리처드슨(Sheldon Richardson)이 배치된 수비 라인이 강력했다.[162] 리처드슨은 2013년 AP 통신(Associated Press) 올해의 수비 신인상을 수상했다.[163]
2017년 NFL 드래프트(2017 NFL draft)에서 자말 아담스(Jamal Adams)가 전체 6순위로 지명되어 2018년 NFL 시즌(2018 NFL season) 프로볼에 진출했고,[165][166] 2019년 NFL 드래프트(2019 NFL draft)에서는 쿠엔넨 윌리엄스(Quinnen Williams)가 전체 3순위로 지명되었다.[167]
2022년 NFL 드래프트(2022 NFL draft)에서 제츠는 1라운드에서 소스 가드너(Sauce Gardner, 전체 4순위), 가렛 윌슨(Garrett Wilson, 전체 10순위), 저메인 존슨 2세(Jermaine Johnson II)를 지명했다.[171] 가드너는 2022년 올프로 팀(2022 All-Pro Team)에 선정되었다.[170]
6. 1. 프로 풋볼 명예의 전당 헌액 선수
GM1997–2000